블루프린트

<블루프린트>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이한음 옮김
(부키 출판사, 2022, 영어 원문, 2019)

2024년 1월에 태어난 ‘강가 GANGGA’.

다음은 어디인가?

2025년 강가의 블루프린트에는 출판사와 언론사, 문학상과 예언문학, 그리고 운명과 사랑이 있다. 강가 대표이자 편집자인 나의 결혼, 아내와 지내게 될 첫 해의 여유로운 쉼, 그와 함께 다양한 길들이 눈 앞에 열려있다.

문학상과 예언문학

강가 문학상. 문학상을 통해 뛰어난 작가를 발굴하고 세계와 시대가 필요로 하는 텍스트를 세상에 전하는 일은 강가의 꿈 중 하나. 이를 위해 출판의 기초인 편집과 교정, 출판 디자인, 출판 마케팅(레거시 미디어, 소셜 미디어, 공공기관 선정도서 추진)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문학상 심사와 평론이 가능한 권위자들의 조언과 도움이 필요하며, 문학상을 위한 재정 준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강가 문학상의 철학에 대한 담론이 필요. 강가 문학상은 <예언 문학> 장르의 시작점이며 이 장르가 SF와 다른 점은 현실과 실현에 있다. 언제나 새로운 장르의 출현이 그렇듯 <예언 문학> 또한 작품 자체로서 새로운 장르의 개척을 증명 할 수 있다.

새 해, 나의 첫 소설이 출판된다면 그 제목은 <아가디르>, <리틀보이>, <베타> 혹은 <바그란트>가 될 것이겠지만, 강가 문학상을 제정하기 전, 문학심사와 평론, 천재들의 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연구가 선행되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첫 소설로 다른 문학상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가능한 최선의 경험이 될 것이다. 종종 권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재능은 도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증명한다. 아방가르드는 아카데미에서의 최고에 선 자들에게도 닫혀있지 않다. 문학상을 위해서라면 4권의 소설 중 <베타>가 최선일 것이다. <베타>의 소재는 베타세대이며, AI, 대만전쟁, 양자역학, 메타버스, 미래세대의 문화 예술과 철학(만일 그것이 설명 가능한 어떠한 형태로 존재한다면)이 될 것이다. 문학상의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것은 권위의 인정에 대한 필요와 스스로의 수준에 대한 인정 문제가 될 수 있다. 다만 출판 가능 유무의 문제는 아니다. 그 문제는 이미 넘어섰다. 원하면 한다.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자비출판했다. 그러나 작품과 재능은 스스로를 대중과 시장에서 증명한다.

강가 문학상은 <예언 문학> 장르를 격려하며 지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언 문학>이 무엇인지 담론이 필요하다. <예언 문학>의 첫 모델을 SF의 원조인 <프랑켄슈타인>으로 떠올릴 수 있겠지만, 다르다. <예언 문학>은 SF와 멀고 현실 정치와 역사에 더 가깝다. <예언 문학>은 가까운 미래(10-20년 후의 미래)를 향한 진지한 혹은 계시적 예언을 시도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조지 오웰의 <1984>를 소환한다. 그 소설이 정확한 시점의 연도 1984년을 숫자로 표시했기 때문이다. 예언이라는 단어는 논란의 소지가 많은 단어다. 특별히 신학에서 신의 계시 측면에서. 내가 언급하는 <예언 문학>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나는 소원한다 그리고 기다려왔다. 그 장르의 도래를.

예언 되었기에 이루어진 역사가 실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더이상 무력하지 않을 가능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천재

강가 출판사는 천재를 기다린다. 천재는 그 당시 시대 인물들의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한걸음 혹은 몇 걸음 더 시대를 앞선다. 천재는 사적 경험을 너머 시간을 초월하고 압축하는 일이 가능하다. 천재는 시간을 뛰어넘는다. 경험 없이 알 수 없는 것을 경험 없이 알고 있다. 또한 예측과 예언은 다르다. 이 문제는 심오하다. 지능과 지혜가 다르듯. 통섭의 흐름 속에 떨어지는 직관과 번쩍이는 창의력은 계시만큼 위험하고 매혹적이다.

천재적 작품들은 이미 세상에 있는 예술의 변주와 카피가 아닌 고유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닌다. 하나의 천재적 작품은 학문들을 파생시키며 교수들을 배출시키지만, 역으로 학문과 교수들은 평생 단 하나의 오리지널리티를 남기기 힘들다. 그것이 철학자와 천재 그리고 학자와 교수의 근본적 차이다.

강가는 천재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러한 천재를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내는 것. 강가 문학상으로 초대하는 것. 나아가 시대를 앞선 그들의 텍스트를 출판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 그것이 바로 강가 대표이자 편집자인 나의 능력과 책임이다. 발굴은 출판사와 편집자의 제1과제다.

언론사

강가 언론사는 큰 도전이다. 언론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 그러나 세상에 필요한 일. 언론의 기초를 다지는데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에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분들과 소셜 미디어에서 새로운 언론 생태계를 경험한 비교적 젊은 언론인들이 필요하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함께 할 때 가능해진다. 기사는 문학이 아니다. 사실과 논리의 세계, 진실의 진실을 찾는 싸움이다.

의미

강가는 무엇인가. 강가의 철학은 무엇인가. 강가의 방향은 어디를 지향하는가. 2025년 강가의 블루프린트, 그 걸음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깊이 파고들어갈 시간이다.

안단테

어린 아내와 지내게 될 첫 해는 여유로운 쉼과 즐거운 놀이여야 하기에. 안단테. 조금 느리게. 그 템포가 필요하다. 그렇게 쉼을 누리며 2025년 강가의 블루프린트를 응시하고자 소망한다. 그렇게 열린 2025년의 길들을 응시한다. 나는 그 안단테의 음조들이 느리지만 진한 울림을 지니며, 심원한 곳을 응시하는 작곡가의 교향악, 그 완전한 조화를 향하는 작품의 서곡이길 소원한다.

300부터 500, 그리고 800, 결국 도달하게 될 100과 000

한국의 도서십진법 분류에는 출판된 도서의 ISBN 13자리에 추가되는 부가번호가 있다. 부가번호 맨 마지막 3자리는 책의 종류를 분류하는 번호다. 거기에는 300 사회과학, 400 기술과학, 500 자연과학이 있고, 800 문학 그리고 100 철학, 000 총류가 있다. 아래의 글 몇 개는 그 선상을 고민한다.

과학

정치와 경제는 보통 300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400 기술과학, 500 자연과학으로 나아가며 순수과학에 가까워진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부터 인류는 신학으로부터 벗어나 인류의 합리주의적 측정가능 방법을 사용한 학문 지식을 축척해왔다. 그것이 과학. 그렇게 모든 학문들은 신학과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길을 학문의 분과로서 개척했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 미래에 대한 단서들과 지식들은 대부분 300-500 사이에 있다.

때문에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 문학>을 쓰는 이들의 실제 영역은 300-500 사이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텔라 마리스>를 유고작으로 남긴 코맥 메카시가 800 문학을 거의 읽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과학적 지식의 최신 자료들이 있는 기관을 서성이는데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90세의 나이에도 늙지 않으려 저항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어렴풋이 또는 뚜렷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300-500을 포기하는 순간, 글이 늙는다는 것을. 문학이 자아의 사적 경험으로 축소되고, 예술은 시대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을.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은 언제나 시대를 앞선다. 그렇다. 미래는 늙지 않는다. 그것이 300-500의 의미. 그러한 의미에서 <블루프린트>라는 책의 표지 일부가 이 글의 이미지로 쓰였다. 크리스타키스는 300-500을 넘나드는 저자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총류 그리고 종교

그러나 결국 인류 정신의 최종 싸움은 100 철학, 200 종교, 그리고 통섭의 세계이며 언론의 현실이기도 한 000 총류라 할 수 있다. 파편은 전체의 조각이기에.

문학

800 문학. 위의 통섭의 과정을 통과한 뒤 다시 800에 도달한 문학은 이 지점에서부터 세상을 향한 반격을 시작한다. 문학이라는 예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반격이다. 기존 문학이 품고 있던 영혼, 감정, 삶과 죽음, 슬픔, 위로, 경험, 역사의 재조명. 문학은 그 한계 지점을 넘어서는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통섭을 통과한 문학은, 문학이 자신의 한계 영역을 넘어, 현실에 대한 감정과 사색을 넘어, 세상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문학이 세상을 뒤쫓지 않고 앞서는 순간이 온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문학 예술의 반격. 바로 <예언 문학>의 존재의의다.

동시에 문학이란 예술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예술 담론은 여전히 고수된다. 그것은 문학이 순수한 예술로 남아 현실의 물리적 힘과 다른 가치를 지니는 존재여야 한다는 반론이다. 순수한 서정을 위해 존재하는 서정시처럼 말이다. 그 반론은 정당하며, 예술의 본래 목적 중 하나로서, 인류의 삶을 정서적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하기위해 존재한다. 문학은 예언으로서의 반격과 함께 기존에 자신이 취하고 있던 예술의 자리를 고수할 것이다.

예언문학과 언론사

강가 언론사를 설립하고, 강가 문학상을 준비할 것인가?

어떠한 서곡

그 선택에 따라 강가가 과연 작품이 될 것인지 아닌지 결정될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운명의 존재 유무에 따라 역사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달라진다. 이 시대는 절대성이 사라진 시대. 낭만주의가 잠들고, 그와 함께 운명도 잠든 시대다. 그러나 종교와 사랑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묘한 역설이다.

그대는 운명의 존재, 역사의 결정론적 시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한 개인의 사랑의 운명을 믿는다면, 그는 결단코 그것이 온 인류의 역사의 운명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운명이 있던가, 신이 있던가, 영원성이 있던가, 절대성이 있던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진화와 우연의 연속이던가, 둘 중 하나다.

여기에서 중론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이들은 부드러운 품위를 지닌 듯 보이지만 진실의 친구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이사야 벌린이란 천재의 귀결. 그러나 그 논의는 이제 흐려졌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망각하고 미제로 덮어두기로 했다. 철학자들은 전체적 철학과 거대담론에서 물러나 언어 속으로 숨은지 오래다. 그러나 비판할 수는 없다. 회피는 평온히 살려는 인간의 본능이자 겸손이기 때문이다.

결혼과 운명

낭만주의가 죽은 시대에 결혼과 운명은 의미를 상실한다. 영원한 사랑은 순진한 고민이 되었다. “운명은 있다.” 이 한 문장이 진실일 때, 그 진실에 따라 거대한 모든 것들의 정의가 새로 내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앞엔 비극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우연적 사고들과 죽음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것이 실제 현실이다. 때문에 인간은 홀로 운명이 없는 대지에 서 있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낭만을 쟁취하기 위해 반항한다. 온전한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신적 운명과 허무한 우연을 상대로.

자유

역사에 운명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이곳은 천재들과 철학자들이 평생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답할 수 없는 것은 고민하지 않겠다는 오래된 지혜자들이 대답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 대답이 더 지혜로운 자들의 대답은 아닐 것이다.

자유는 가장 중요한 세 가치 중 하나다. 그의 곁에는 정의와 사랑이 있다. 정의는 우주의 골조이며, 사랑은 우주의 영혼이 담긴 심장이고, 자유는 우주 전체의 생명으로서의 자연이다.

세 가치 중에서 강가는 자유를 지향하며, 그 의미는 정치적이지만 보다 철학과 신학에 가깝다.

출판사와 언론사, 문학상과 예언문학, 그리고 운명과 사랑. 그곳이 강가의 2025년 블루프린트가 그려지고 있는 화폭이며, 선택의 기로다.